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재 위치
  1. 게시판
  2. PEOPLE

PEOPLE

갤러리입니다.

게시판 상세
문장으로 가방 / 시인 이제니
작성자 onemorebag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5-12-30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1549

돌과 돌은 멀다. 달과 달은 멀다. 물과 물은 멀다. 말과 말은 멀다. 말과 물은 멀다, 물과 돌은 멀다. 돌과 달은 멀다. 달과 말은 멀다. 달과 달이라는 말은 멀다. 돌과 돌이라는 말은 멀다. 물과 물이라는 말은 멀다. 말과 말이라는 말은 멀다.

멀어지는 사이 다시 떠오르는 말
달아나는 사이 다시 사라지는 달

<달과 돌> 중에서.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돌과 달과 물과 말이 뒤엉켰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꽃과 재가 있었고, 기린과 구름이, 나무와 앵두가 있었다. 내가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이것들은 무엇을 뜻할까 생각을 되짚어 보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입가에 맴도는 말의 소리와 리듬이었다. 눈앞에 줄지은 글을 읽는 목소리를 복잡한 두뇌가 따라잡지 못했다. 내 삶은 이 시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설익어서일까, 하는 의문점과 함께 책을 마쳤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단어들로 이런 혼란을 야기하는 작가는 어떤 생각인 걸까.

-

시인을 직접 만나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합니다. 시인이 되는 것은 어땠나요?
오래도록 소설 습작을 해왔었는데 시로 등단을 하게 됐어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투고를 했으니까 등단하기까지 15년 넘게 걸린 것 같아요. 습작기간이 오래되다 보니 등단 직전에는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상태였어요. 이번이 마지막이다 라는 심정으로 그동안 모아둔 시를 투고를 했는데 그 시편들이 당선이 된 거지요.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에서 터졌네요. 기분이 이상했을 것 같아요.
계속 써나가라는 응원처럼 느껴져서 감사했지만 한편으론 그토록 오래 소설을 써왔는데 어째서 시로 등단을 하게 됐을까 스스로 의아하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시로 등단을 했다고 해서 글쓰기가 달라진 것은 아니에요. 습작 시절에도 시가 소설 같고 소설이 시 같다 라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언젠가는 소설로도 독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 소설가가 되려고 했나요?
시와 소설은 각각 고유한 장르적 특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에게는 기질적으로 소설쓰기가 더 맞다고 느꼈어요. 작가가 되어야겠다 라고 결심하기 이전부터 소설을 쓰고 있었으니까요. 머리로써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따라 간 것이지요. 그렇다고 시를 쓰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초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학교 문예부 활동을 했었는데, 시도 쓰고 산문도 쓰고, 그야말로 문학소녀라고 할 만한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좋아하는 시편들을 필사도 많이 했었는데요, 그렇게 좋아했는데도 백일장에 나가 쓰는 정도 외에는 시인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시인이라는 존재는 뭐랄까, 일종의 채널링이라고 할까, 어떤 신의 영역에 가까운, 하늘의 말을 받아 적는, 그렇게 타고난 기질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럼 시인님은 시를 어떻게 쓰시나요?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쓰려고 합니다. 벼락처럼 영감이 찾아와서 한달음에 써내려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영감에 의지해서 쓰는 것도 한순간이거든요. 영감이라는 것도 몸과 마음을 오랫동안 예열하는 시간이 있어야지만, 그러니까 무언가 말하려는 그것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아야지만, 어느 순간, 문득,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거든요. 어떤 목소리 혹은 사물과 세계의 본래의 모습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작년(2014) 겨울에 출간된 두 번째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읽어보았습니다. 바람, 구름, 나무 등의 자연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거제도의 영향이 큰 것인가요?
어떤 구체적인 풍광이나 자연물, 혹은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무엇으로 시를 시작하지 않는 편이에요. ‘나무’나 ‘구름’, ‘바람’ 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들여다본다기 보다는 ‘나무’, ‘구름’, ‘바람’ 과 같이 어떤 사물들의 이름을 통해, 사물을 가리키는 낱말들을 통해 그 사물의 내부로 들어간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거제도에 오래 살고 있는데도 시편에서 그런 자연의 이미지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했어요. 그렇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더라도 제가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란 것은 글쓰기에 당연히 묻어날 수밖에 없는 거겠죠. 초등학교 시절, 창문을 열면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살았어요. 집에서 어른 걸음으로 서너 걸음만 걸으면 바다로 바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바다가 가까이에 있었어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내내, 물결이 오고 가고, 배가 오고 가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또 태풍이 몰아닥쳐서 파도가 사납게 일기도 하고, 그러다 또 어느 결에 잔잔해지고. 그렇게 반복적으로 밀려오는 물결과 물결과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을 매일매일 바라보면서, 무한에 대한 감각이랄까, 무한의 무게와 똑같은 소멸의 이미지라고 할까, 그런 감각이 저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거겠죠.

글에 나오는 바다가 꼭 바다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군요. 하지만 나무와 앵무, 구름과 기린이 나오면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시각화를 하게 되는데, 말씀하신 대로라면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시인님의 작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시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정서를 그려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나 정서를 드러내고 가리키는 언어의 흔적, 그 언어가 사라지는, 그렇게 무어라 부를 수 없는 무언가를 매순간순간을 따라 가보려는, 그것을, 그 순간을 드러내보려는 시도 그 자체가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제 글쓰기에 있어서는 언어가 특별한 위치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가 언어를 불러오고,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면서, 이렇다 할 중심이 없이 모호하게 확산되는 듯 하지만 어떤 일관된 리듬 속에서 어렴풋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어떤 감정의 결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어렴풋하게 수렴되는 어떤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의 의미에 붙들리기 보다는 일단 그런 리듬을 따라가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 읽기를 어려워하시는 분들은 대개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듯이 정확한 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답을 찾으려고, 단 하나의 의미를 해석해내려고 애를 쓰다 보니, 시 읽기가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전형적인 독법에서 벗어나서 몸과 마음을 좀 가볍게 하고, 시 한 편 한 편에 집중하기 보다는 일단은 시집 전체를 훑는다는 생각으로 읽다 보면 시인들 고유의 리듬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계속 읽어 내려가면서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의미를 더해 봐도 좋을 것 같구요. 제 시편들에서도 ‘구름과 기린’, 혹은 ‘꽃과 재’와 같은 낱말과 낱말 간의 상관관계를 논리적으로 따지려하기 보다는, 단어들이 반복되고 중첩되고 충돌하는 그 리듬만을 따라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머리보다는 감각으로 읽는 것 같아요.
시집을 묶을 때마다 시편들의 배치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첫 번째 시집도 그렇고, 두 번째 시집도 뒷 페이지로 갈수록 점점 더 리듬이 고조되는 듯한 느낌으로 시를 배치했어요. 어떤 심장 박동을 따라가듯이, 조금은 가벼운 시편들을 시작으로 점점 말이 속도를 높여 달리듯 급박한 호흡으로 흘러가는 구조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편들을 묶었어요.

그래서인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읽으니 훨씬 좋게 다가오더라고요. 나중에는 모든 문장들이 연결되어서, 저도 모르게 랩 하듯이 리듬을 타고 있었어요.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의도하신 대로 읽었다니 뿌듯하네요. 학교에서 배우던 시는 참 엄숙했어요. 그래서 항상 어려운 문학이라고 느꼈는데, 혹시 대중성을 고려하신 건 아닌가요?
대중성이라는 것만큼 모호하고 예측하기 힘든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독자를 의식하거나 특별한 의도 혹은 전략을 가지고 써내려가진 않습니다. 시라는 것이 그렇게 전략을 가지고 씌어지는 것도, 전략적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어떤 언어적 상황에 처한 사람이 그렇게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시를 쓸 때 파괴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언가를 파괴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지는 않지만,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라면, 저는 어떤 상투성이라고 할까요, 안이하고 쉽게 씌어지는 문장들, 시를 통해서 어떤 깨달음의 말을 늘어놓으려는 태도를 경계하려고 합니다. 제가 써내려가는 시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는데요. 그저 시라는 그 무엇으로, 그것 그대로, 아무런 설명 없이, 아름답고 온전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시, 그런 글은 왜 안 좋은 건가요?
좋은 시편들은 짧은 한 줄의 문장으로도 삶의 비의를 드러내 보여주고 어떤 깨달음을 주지요. 저 역시도 그런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라구요. 하지만, 시는 그런 식의 잠언 그 자체가 아니거든요.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으면서 지시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시인님에게 특별한 작품이 있나요?
언제나 오늘 쓴 시가 가장 좋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써내려간 시편들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지 않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돌아가서 읽게 되는 시가 있어요. <페루>라는 제 등단작인데요. 시를 쓴다, 혹은 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의식 없이 써내려간 시편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에너지로 한달음에 씌어진 시이기도 하구요. 문득문득 무언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고 느껴질 때면 <페루>를 다시 읽어보곤 해요.

영화 [인셉션]에 나오는 토템과도 같은 존재군요. 자신을 잃어버릴 때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것.
누구나 춥고 어두운 시절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 당시에는 춥고 힘든 기억이지만, 또 돌이켜보면 그런 시련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한 발 더 나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고유한 빛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해요. 일평생 살아가면서 그 타고난 빛을 마음껏 거침없이 발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들 고유의 에너지라고 할까, 잃어서는 안 되는 날 것 그대로의 본성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을 잘 간직해야 되는 것 같아요.

그러려면 가끔씩 계기라는 게 필요하지 않나요? 계속 거제도의 집에서 생활하시면 변화는 어떻게 만드는지.
일상이라는 것이 남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도 같은데요. 대부분 읽고 쓰고 듣고 보는 일들로 채워지고 있구요. 될 수 있으면 단순하고 규칙적으로 지내려고 합니다. 대학을 마치고 다른 도시에서 살다가, 진정 글쓰기에만 집중해보자고 다시 거제도로 돌아온 것이 서른한 살 무렵이었어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의 일상이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 외에는 주기적으로 여행을 가는 정도이구요. 소소하게 국내 여행도 다니고, 몇 년에 한 번씩은 외국으로도 가구요. 2009년인가는 휴스턴의 NASA에도 견학을 갔던 기억이 있네요. 몇 년 전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싶어서 시베리아로 날아갔던 적도 있구요. 그 여행에서 좀 큰 사고를 겪었는데, 그 이후로는 아직 멀리 가질 않았는데, 이제 건강도 좋아졌으니 다시 어딘가로 가고 싶어지네요.

굉장한 경험들을 찾아다니시네요. 새로운 계획은 없나요?
2010년부터 ‘더플 플레이 포엠’이라는 낭독회를 만들어서 진행을 하고 있어요. 몇 년간은 글쓰기도 바빴고 또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낭독회를 쉬고 있는 상황인데, 내년부터는 낭독회도 다시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쌍둥이 언니랑 오래전에 계약해둔 산문집 원고가 있는데, 내년에는 그 산문집 원고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원모어백에서 시인님의 천가방을 만든다고요. 가방에 들어가는 구절은 무엇인가요?

'열리고 열리는 여리고 어린 삶 /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삶이란 것이 늘 자신의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런저런 실패와 실수 속에서, 좌절도 하고 절망도 하면서, 그런 날들 속에서 상처도 받고, 그렇게 아픈 자리가 아물면서 단단하게 굳은살도 박히면서. 그렇게 삶은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상처라는 것은 아물었다 해도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흔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그 자리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삶은 매순간 반짝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면 가장 어두웠던 순간이 가장 환한 순간이었구나 새삼 느끼게 되는 것처럼요. 그렇게 삶은 여리고 어린 나를 향해 끝없이 무한히 열리고 열리고 있는 거거든요. 새로운 문이 열리고, 새로운 열매가 열리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앞머리만 무성하고 뒷머리에는 머리카락 한 올 없다. 그를 발견한 자가 머리채를 쉽게 잡기 위함이며, 한 번 지나가버리면 다시 붙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한순간에 무엇이 되는 사람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시인이 되어버린 사람의 삶 속에는 언제나 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일수록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어쨌거나 이제니 시인은 9년 전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잡았고, 앞으로도 여지껏처럼 글을 쓸 터였다.

시인을 만났던 날의 공기는 유리처럼 맑고 푸를 정도로 투명했다. 그리고 우리가 앉았던 망원동 카페의 2층 자리에는 오후 내내 강렬한 햇살이 비추었다. 부서질 것만 같은 여린 날 중에도 곳곳에 뜨거움이 흔적을 남겼다. 너무 뜨거워서, 그것이 지나간 자리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interviewee시인 이제니
interviewerTHE, A 더콤마에이 thecommaa.com
ARTICLE ALL RIGHT RESERVED
COPYRIGHT (C) ONE MORE BAG, THE, A

문장으로 가방

첨부파일 04.jpg
비밀번호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댓글 수정

비밀번호 :

/ byte

비밀번호 : 확인 취소

 

RECENT LIST

이전 제품  
다음 제품

WORLD SHIPPING

PLEASE SELECT THE DESTINATION COUNTRY AND LANGUAGE :

GO
close